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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는 장자냐 나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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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211회 작성일 16-03-3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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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와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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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작품세계에서 포착되는 자아의 분열은 그가 즐겨 읽은 노장(老莊)사상의 세계관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고 상호 순환하는 그의 인물들의 형상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의 비유를 연상시켜준다                  

 

“전에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라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뒤에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나비의 꿈을 꾸는 장자인지 장자의 꿈을 꾸는 나비인지 모르겠다는 이 호접몽의 비유는 절대인식을 위해서는 일체의 존재를 하나로 봐야한다는 입장에 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선악이나 미추,시비 등의 상반되는 것들을 구분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이 도가적 사유방식에서는 물아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세계에서는 꿈과 현실의 구별이 다 부질없는 짓이고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가 된다.

    그렇다면 갑충으로 변신한 <변신>의 그레고르는 갑충인가? 아니면 세일즈맨으로서의 그레고르 잠자인가? 또한 체포된 상황에서도 자유로운 활동을 보여주는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카는 피고인가? 아니면 은행지배인인가? 노장의 사유체계에서는 이것이 장주와 나비의 구별 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반되는 두가지 형태의 존재는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모순된 관계가 언어적으로 합일된 형상일 뿐 두가지 중 어느 하나도 그 존재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카프카의 서술공간에서 늘 반복되는 ‘사회적 외부세계와 심리적 내부세계의 변증법적 교체관계’는 장자의 호접몽의 비유를 닮았다. 주인공의 시점을 매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사건들은 그것이 각 등장인물들의 객관적인 사실인지 주인공의 주관에 의해 투사된 ‘왜곡된’객관인지 구별을 어렵게 한다. 개인적 시점에 의해 전달되는 피서술세계에 주인공의 경험적 현실과 꿈같은 자의식의 반영이 혼합,교체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순환도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내부와 외부의 순환은 환상세계가 경험세계를 탈취하고 여기에 새로운 경험세계가 연속됨으로써 풀리지 않는 의문의 연속이 발생한다. 즉 끝없이 미궁을 헤매는 파라독스의 순환을 보여준다.

 

가령 <소송>에서 어느날 갑자기 침입한 소송이라는 사건은 요제프 카의 외부세계에서 발생하여 그를 압박하는 사회적 사실로 등장하지만 진행과정에서 노출되는 그 속성은 현실을 벗어난 초논리의 공간을 차지함으로써, 이것이 외부세계속에 처한 자신의 존재방식을 보는 내면세계의 시각이라는 강한 암시가 있는 반면에,자신의 의식세계에 대한 외부세계의 폭력적 간섭이라는 외형적 줄거리를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피곤한 세일즈맨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신된 상황에서도 인간의 의식으로 사고한다. 변신이라는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고 또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소망한 것이라는 일면도 있다. 그가 그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피곤한 삶에서 벗어나 ‘놀고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달콤한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흉칙한 갑충의 모습은 그레고르 자신이 보는 자신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늘 기계처럼 일하며 돈을 벌어오는 비인간적인 생활의 패턴에서 보여지는 자신의 억눌린 모습이 벌레와 다를바 없다는 자의식이 투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판단은 자신만이 유일한 생활부양자인데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그도 모르는 저축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감지된다. 그렇다면 그의 일상의 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본질적인 모습은 벌레의 형상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레고르 잠자는 외형적 자아와 내면심리가 투영된 벌레의 모습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보다 완성된 자기인식을 획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외부세계의 내부세계,그리고 내부세계의 외부세계’의 형상으로서 충분한 결말이 나지 않는 가운데 회전을 멈추지 않는 ‘의미의 순환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순환의 고리는 자아분리의 관찰을 통해 보다 정확한 인식을 획득하기 위하여 자아에 거리를 부여하는 서술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에 대한 거리부여는 그러나 카프카의 경우 내외순환을 통한 인식획득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인식의 한계를 인식시켜주는 기능이기도 하다. 이것은 카프카의 아포리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예시된다.

 

“짐승은 주인으로부터 채찍을 빼앗아 주인이 되기위해 스스로 채찍질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주인의 채찍가죽 속에 있는 새 매듭을 오인한데서 온 환상이라는 것을 모른다.”

 

여기서 짐승은 이미 자신과 주인의 관계를 인식하고 주인으로부터 그 역할을 몰수하려한다. 짐승의 영역을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주인과 짐승,때리고 맞는 상황속의 객체로 인식하는 거리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주인이 되기 위해 채찍을 빼앗으므로’ 그의 외부상황은 내부세계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내면의 환상에 머물 뿐이다. 외부세계를 포괄하는 내면세계는 ‘새로운 매듭’으로 인해 생긴 외부세계의 산물인 것이다. 이리하여 내부와 외부,주체와 객체의 파라독스한 순환은 결말이 없는 가운데 진리의 절대인식 불가와 마찬가지로 주객순환에 의한 인식의 한계를 노정시킨다     

 

현실과 환상이 뒤얽힌 허구공간에서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카는 상반   된 두 세계의 분리를 거부하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즉 변신의 이유를 불충분한 수면의 탓으로 돌리는 그레고르처럼 피고가 되어버린 상황을 자신이 잠을 깨고 난후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쓴 결과라고 여기는 인식혼돈의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객분리를 지양함으로써 인식에 도달하려는 사유방식은 그러나 카프카의 경우 절대인식과는 상관없이 ‘인식과 이해가능성’을 진단하는 서술테크닉일 뿐이다. 스스로 채찍질하는 짐승이 그 행위를 통해 주인이 된다는 것이 외부세계를 오인한데서 생긴 환상이라는 것을 모르듯이,또 요제프 카의 경우 법정의 투사세계가 인지를 방해하고,그것에 대한 부인이 현실인식을 방해하듯이,카프카의 경우 그 자신 말하듯이 진리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도처에서 포착된다.

 

이것은 노자의 ‘道’에 대한 인식과 흡사하다. 노자가 보는 도란 ‘인간의 인식이나 표상,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어떤 말이나 개념으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어두컴컴한 가운데 현실과 환상이 맞부딪치고,초사실적 내용이 논리적 언어의 외피를 쓰고 형상화되는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로고스보다는 카오스를,빛보다는 어둠을,유형보다 무형을,有 보다는 無를 근원적으로 보고자 하는’ 노자의 세계관이 연상된다. 카프카는 현세적 공간에서 순수자아의 소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소외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낯설음으로 인해 외부사회속에서의 순수자아는 바로 그 ‘낯설음’Verfremdung의 수법을 통해서만이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여진다. ‘변신’이나 정체불명의 ‘소송’이나 아버지의 ‘익사선고’나 발버둥쳐도 도달할 수 없는 ‘성’이나 모두 한결같이 낯설음의 기법으로만 형상화될 수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카프카에게서 발견되는 순수영역의 절대주관의 공간이라고 할 것이며 동시에 ‘완전히 소외된 주관성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절대주관의 세계가 비극으로 귀결된다는데 있다. 그것은 “끔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자명성이 충격을 준다“는 주장처럼 카프카의 독특한 사실성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가령 <소송>에서의 요제프 카의 존재는 은행지배인과 피고라는 ‘대립되는 동시성’으로 불안하게 합일되어 있다. 은행이라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외부공간은 순수영역의 내면세계와 더불어 카의 분열적 자아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카프카에게 자본주의가 내외나 상하 등 모든 것이 속박되어있는 종속상태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 주인공의 상황설정을 통해 드러나는 카프카의 세계인식은 ‘내외세계의 대립을 지양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순수자아의 내면세계와 현실적 삶의 대립이 상호 종속적이면서도 상호 부정적인 파라독스의 원을 그린다는 내외순환의 형상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 해소될 수 없다는 현세부정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반되는 것들이 반대로 순환하여 하나로 복귀한다는 노자의 순환사고와 카프카의 사유방식은 유사하지만 소송세계나 변신의 세계에서 형상화되는 카프카의 리얼리티에서는 노장의 무위자연이나 생사일여의 사생관(死生觀)에는 이르지 못한 비극적 현실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극성 역시 내외로 분열된 자아를 배경으로 하고 이있다.

 

요제프 카의 경우 카프카 자신이 깊은 관심을 보인 장자의 사생관과 다를 바 없이 순수자아는 죽음을 기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맞이하는 의식을 보여준다. 마치 부인이 죽었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의 고사를 연상시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난 외부적 일상의 자아는 끝없이 죽음을 외면한다. 처형장에서 자기 머리위로 오고가는 칼을 스스로 빼앗아 찌르는 것이 의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목을 빙빙돌려 삶을 동경하는 요제프 카의 제스처는 그같은 분열적 존재에서 나오는 비극적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깊이 인식되는 죽음이 다른 한편으로 ‘의도하지 않은 행동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그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도가적 죽음이 아니라  ‘개같이’ 죽는 비극적 형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직접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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